3 년 전쯤 일이다.
시각 장애인이 길에서 방향을 못잡고 있는 것 같았다.
길 가운데에 서서 이리 저리 두리번 거리며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는데 인도와 차도가 겸한 이면도로라 차들은 빵빵대고, 근방 가게의 사람인 듯한 몇 명은 그저 쳐다만 보고 있다.   예전 피막골 뒷쪽의 이면도로인데 오래된 동네라 모통이가 직각으로 떨어지지 않아 방향잡기에 문제가 생긴 듯했다.

밥을 먹고 나오던 친구와 나는 가까이 가서 '저기, 도와드릴까요?'하고 물었다.
당황해서 그런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남자는 '일단 차가 없는 곳으로 좀 데려다 주세요.' 라고 급히 답한다.
지팡이를 접더니 '죄송한데 제가 팔짱을 끼는 게 가장 편합니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친구가 선뜻 팔을 내어줬고 그 남자는 팔짱을 끼었다.

안전한 인도쪽으로 데려 와서는 여기(종로구청앞쯤)가 어디며, 어디를 가는거냐고 물었다.
광화문에 가서 버스를 타면 되는데, 갑자기 방향감각을 잃어서 어쩌다보니 길 한 가운데 서있게 된거라 한다.
마침 우리는 저녁을 먹고 청계천이나 산책하려던 참이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여기 어디 쯤이었다. 길이 반듯하지 않아 방향감각을 잃으면 되찾기 어렵게도 생겼다. 출처:Daum 지도)

안심이 되었는지 이얘기 저얘기를 하는데, 우선 커피를 한 잔 사주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가 됐다고 사양을 하자 자기도 목이 마르니 아이스커피 한 잔 마시고 싶다는 것이다.
괜히 길 안내 한 번 해주고 도리어 폐를 끼치는 것같아 재차 사양을 했지만, 사실 아까 너무 당황했었고 무서웠었는데 우리가 진짜 구세주 같았다며 사양하지 말고 한 잔 사주게 해 달라는 것이다. 시간을 빼앗지 않도록 그저 테이크아웃하거나 편의점에서라도 사주겠다는데, 더 이상 사양하기 어려워 그러겠다고 하고는 마침 저렴한 그동네 테이크 아웃점에 가서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그 남자 것 한 잔과 우리는 한 잔만 사서 나눠먹기로 했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가 짧게 한 얘기로는 이 주변에서 친구들 모임이 있었고 평소 가는 길이라 그냥 헤어져서 혼자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나서 피하다가 방향을 놓쳤다고 한다. 그런데 차 한 대가 너무 빵빵거리는 바람에 놀래서 다른 쪽 방향으로 뛰고 그러다가 방향을 완전히 놓치고는 길 한 복판에 서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놀라서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했는데,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발소리를 들리는데 자기쪽으로 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밥을 먹고 나갔을 때 그 길에는 그 사람 말고도 그 주변거주인들로 보이는 아저씨가 네다섯명이나 계셨었고, 그 남자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한테 보였고 들렸던 모습과 소리가 그들에게 안 보이고 안 들렸을리는 없다. 심지어 그 중에는 웃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다 창피했다. 시각장애인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웃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게 창피했다.

단지 이 시각장애인은 스스로 당황했다고 하듯이 겉보기에 패닉상태에 있는 것처럼 허둥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정상인도 길거리에서 차가 빵빵대면 놀라고 당황스러운데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니 오죽했을까. 그 사람이 패닉상태였다 해도 그게 피할만큼 이상한 몸짓이나 생김새는 전혀 아니었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정말 목이 말랐던 듯 커피를 거의 단숨에 들이키다시피 했다.  찬물을 다시 채워달라고 해서는 그것까지 들고 광화문까지 같이 걸어갔다. 길이 좁아 내가 앞장서고 그 남자는 친구의 팔짱을 끼고 같이 걸어왔다. 보폭을 맞추는게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좀 걷다보니 금방 자연스러워졌다.

어떤 일을 하는지는 정확히는 잊었는데 글을 썼는지 음악을 했는지 아무튼 무엇인가 예술활동을 한다고 자기를 소개했다. 정거장에 도착한 우리는 내친김에 버스 번호를 확인하고 태워주는 것까지 했다. 보통때는 정류장에서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사람이 모여있는 곳에서, 단순한 질문을 하면 누군가는 도와준다고 한다.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전해들으면서 그 남자와는 헤어졌다.

시각장애인이 길 한 가운데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 도와주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상황이야 말로 절대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다. 안전상의 문제도 있지만 시각외의 감각이 뛰어난 그들이지만 한 번 놓쳐버린 방향 감각은 되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지하철 무개념녀 이야기를 보면서 예전 이 일이 생각났다.
안내견을 더럽다, 내려라, 사과해라도 모자라 결국 열차를 세우려고 까지 했으니 그 무식함과 무매너가 정말이지 한심하다. (할 수만 있음 보이지 않는 손으로 뒷통수를 한 때 때려주고 싶음 -_-;;)  시각장애인이 겪는 불편은 실제 처할 수 있는 위험이나 불편 외에도 이런 끔찍한 인간들에 의해 받는 상처가 더한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불의의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살피고 배려하며,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면 지체없이 도와주는 것 정도면 최소한의 더불어 사는 사회이지 않을까 싶다.


시각장애인이 길에서 방향을 잃고 헤맨다면, 구경만 하지말고 한 번 물어봐주세요 "도움이 필요하세요?"라고요.
어렵지 않습니다.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지만 그때도 전화 한 통 대신 해 주는 것으로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Posted by 네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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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즘은 왜 이렇게 개념하고 담쌓은 사람들이 많은지....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

    2011.07.16 09:4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냥 위험한 길에서만 데리고 나왔어도 괜찮았을텐데 개념하고는 정말 담쌓은 모습이었습니다.

      2011.07.19 10:10 신고 [ ADDR : EDIT/ DEL ]
  2. 네오나님이계시다는게 행복합니다.
    복많이 받으실겁니다.
    그래서ㅡ 세상은 살맛나는겁니다.
    네오나님같이 착한분들이 계셔서 살맛나는겁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2011.07.16 10:26 [ ADDR : EDIT/ DEL : REPLY ]
    • 제가 착한 게 아니라 거기 계시던 다른 분들이 넘 의식이 없으신거 같았어요. 그냥 더불어 산다는 생각만 했어도 좋았을텐데...

      2011.07.19 10:11 신고 [ ADDR : EDIT/ DEL ]
  3. 요즘 자주 이슈가 되고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행동하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답답한 일이네요,,,

    2011.07.16 11:1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저렇게 상처주는 사람들을 보면 참 잔인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011.07.19 10:11 신고 [ ADDR : EDIT/ DEL ]
  4. 네 좋은 말씀입니다. 누군가 도움을 구한다면,
    도와줘야 마땅할 터인데, 세상이 정말 너무
    각박해진 것 같습니다.

    2011.07.16 11:3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5. 정말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워낙 세상이 각박하고 무서워서 도움을 선뜻 드리기가 힘든것같아요.

    2011.07.16 11:4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훤한 대낮에 시각장애인을 도움을 청하는데 무섭기는요.
      걍 길에서만 데리고 나와주기만 했어도 됐을걸요.

      2011.07.19 10:13 신고 [ ADDR : EDIT/ DEL ]
  6. 항상 이점만 명심하면 될겁니다. 장애는 타고나는게 아니라는거... 살면서 누구나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장애인이 될수 있다는것만 생각한다면 절대 남일이 아니랍니다~ 네오나님 참 잘하셨네요~

    2011.07.16 11:4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러게요. 정말 나쁜 생각이지만 당신이나 가족 중 누군가도 그렇게 될 수 있어요 라고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2011.07.19 10:13 신고 [ ADDR : EDIT/ DEL ]
  7. 좋은 일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생긴다는 점을 모르고 살지요.
    그리고 장애인도 우리와 같은 한명의 이웃이라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2011.07.16 11:45 [ ADDR : EDIT/ DEL : REPLY ]
  8. 선행을 이럴 때 해야겠지요 ^^

    2011.07.16 12:0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9. 네오나님 정말 멋진 분 이셨군요.
    훌륭하시고 장하십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사람도 있겠으나
    예전에는 당연했던 것조차 지금은 아무도 도와주려고도 않합니다.
    그 시각장애인은 얼마나 걱정이 컸겠습니까?
    그냥 위험한 곳에서 밖으로 내보내 주기만 하면 되는데
    몇 사람이 빤히 보면서도 그냥 있었다는것은 우리들이
    부끄러워해야 될 잘못입니다.
    아름다운 글 잘보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시고 좋은일 마구 생기시길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2011.07.16 12:1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게 이해가 안 되요. 그냥 손 잠깐 빌려주면 되는 걸 왜 도와주려하지 않는 건지...
      같은 인간인데 말이죠.

      2011.07.19 10:15 신고 [ ADDR : EDIT/ DEL ]
  10. 비밀댓글입니다

    2011.07.16 12:55 [ ADDR : EDIT/ DEL : REPLY ]
  11. 백번 옳으신 말씀이세요!!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이..
    참 안타까울따름이네요 ㅜㅜ

    2011.07.16 13:0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12. 아니 당황한 시각장애인이 도와달라고 하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다니..
    순간 글을 읽으면서도 너무 화가 났네요...그래도 네오나님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네오나님이 그래도 대중의 마지막 양심을 지켜주신 것 같아 제가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네요..

    2011.07.16 16:5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넘 기가차죠? 이해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니까요.
      무슨 생각들인지 인터뷰라도 따볼 걸 그랬어요 --;;;;

      2011.07.19 10:17 신고 [ ADDR : EDIT/ DEL ]
  13. 참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 정말 좋은 일이죠...
    즐거운 시간되세요

    2011.07.16 17:3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저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게 칭찬받는 게 좀 이상한 것도 같아요 ㅎㅎ

      2011.07.19 10:18 신고 [ ADDR : EDIT/ DEL ]
  14. 좋은 글 다시 한번 읽고 갑니다^^

    2011.07.17 13:5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15. 무개념녀... 이야기를 듣긴 햇지만... ㅠㅠ
    일반인들도.. 자신이 장애를 가질 수 있다 생각하고...
    나 대신에.. 장애인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생각한다면...
    그렇게 무심히 지나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2011.07.17 21:2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