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사는 이야기2011. 7. 26. 09:20


여고에서 일부 남자선생님의 인기는 멀리있는 연예인들의 인기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연예인들이야 극성팬이 아니라면 그저 티비로 보거나 콘서트에 가거나 인터넷에서 기사를 보는 것이 다였지만 선생님이야 매일 볼 수 있는 존재 아니던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정말 인기가 많으셨던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잘 생기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상하고 유머러스한 성격 덕분에 학년과 상관없이 초절정 인기를 누리고 계신 분이셨다. 고3, 그 치열한 시절에 수학 선생님이시자 옆반 담임이었던 선생님이셨다.

 

고3이 되어 가장 친한 친구가 옆반에 배정이 되었고 유별나게 사이가 좋아서는 쉬는 시간 마다 이반 또는 저반에서 함께 있었다. 점심도 같이 먹고 하굣길도 같이 했었다. 학기 시작되고 한 달쯤 후 어느 날인가 친구반에서 쉬는 시간에 놀다 보니 수업종이 쳤는데 우리반은 미선택 과목의 수업이 있는 시간(도서실에 가거나 반에서 조용히 공부하면 됨)이라 예습도 할 겸 친구 옆자리에서 그냥 수학 수업을 들었다.

 

친구가 키가 커서 제일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 한테이블에 원래 두 명인데 세 명이 앉아있었음...수학 선생님이 날 쳐다보시더니 '어이 도토리?! 너 너네반이냐 우리반이냐?'라고 물으셨다. '저 너네반인데요.'라고 답하니 '야, 너네반이 뭐야? 너 우리반 아니지? 왜 헷갈리게 해?ㅎㅎㅎ' '선생님이 너네반이냐고 물으셨잖아요. 저 옆반이예요. 지금 미선택과목 수업중이라서요'하고 답하니 선생님은 그냥 수긍하시는데 오히려 그 반 아이들이 '쟤  우리반 아니었어?'라고 수근거리며 웃는다.

 

아무튼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지만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덕에 양쪽반에 친구가 많았다. 그런데 이 두 반의 친구들이 모두 내 보호자가 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는 아침에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었는데 버스에 사람이 많은 게 싫어서 학교에 좀 일찍 가는 편이었다. 7시10분쯤 버스에 타도 늦지 않는데 30분 정도 일찍 등교를 했었다. 여느때처럼 버스를 기다리던 아침 승용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수학선생님이셨다. 옆자리에는 세계사 선생님도 타고 계셨다.  타라고 하시는데 선생님 차는 처음 타보지만 낯설지 않은 선생님이라 냉큼 탔다. 차를 타서 편안한 것도 있었지만 사실 그 때의 나에게 더 재미있는 것은 두 분의 대화였다. 대학 때 부터 친구였다던 두 분의 대화는 코미디보다 더 재미있었고, 나중에 생각해보니 만담가들 보다더 재미있었다.

 

내려주시면서 내일도 그 시간에 나와있으라고 하셨었다. 그 만담이 듣고 싶어서라도 그 차에 타야겠다라고 생각했었다. 그 다음날 부터 생중계 만담을 아침에 듣는 일과는 시작됐고, 기분 좋은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느날 밤에 야간자율학습(말이 자율이지 강제였다)가 끝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그게 안 됐었는지 선생님은 태워주시겠다고 했다. 다른 친구도 있어서 같이 타고 집으로 갔었는데 그나마 내가 좀 안면이 있다고 옆자리에 탔다.

 

그리고 마침 다음날은 세계사 선생님이 안 계셔서 나 혼자 수학 선생님 차를 타고 등교를 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을 좋아하던 2학년 아이가 하교때도 선생님 옆자리, 등교때도 선생님 옆자리에 앉은 나를 보았고 그 뒤로 내가 수소문 된 것이다. 그 뒤로 쉬는 시간 점심 시간에 이상하게 날 찾아오는 아이들이 생겼고, 밖에서도 쑥덕쑥덕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는 나를 보고 우는 아이도 생겼다. 이상하다고 여긴 친구들이 알아보니 내가 선생님의 숨겨둔 딸로 둔갑된 것이다.

 

이반 저반 친구들이 나서서 '야~ 도토리은 도토리란 말이야! 선생님 딸은 무슨~~' 이라며 해명을 했지만 울면서 찾아오는 아이들도 있고, 시도때도 없이 몰려드는 아이들 때문에 결국 학생과 선생님들까지 나서는 사태가 되었다. 친하게 지냈던 국어 선생님은 너 수학 선생님 딸이라며 놀리기 까지 하시면서 재미있게 사건을 해결하려 하셨었다. 하지만 수학 선생님이나 세계사 선생님이 내 안위를 걱정하셨고, 등굣길 픽업은 멈추게 되었다.

 

사실 그 선생님은 특별히 나를 편애한 것은 아니셨다. 또 나도 선생님을 특별히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선생님에게 무척이나 담담했었기에 편하게 대하셨던 것 같다. 그저 지나가는 길이니까 태워주고 내려주고 하는 사제지간의 정같은 거였는데 그게 이렇게 루머가 돌자 선생님도 많이 당황하셨었다. 물론 웃으면서 대해주긴 하셨지만 내가 모르는 상처도 받으셨을 듯하다. 나야 이반 저반 친구들이 보호해준 덕에 아무런 위험없이 지나갔었다.

 

그 사건으로 우리반, 옆반 아이들은 일종의 공동체 같은 느낌으로 친해져서 학년이 끝날 때까지 아주 친하게 지냈었다. 그렇게 친해진 덕에 지옥같았던 고3이 그나마 즐거운 추억으로 많이 메워졌었던 듯하다. 얼마전 이 친구 중 한 명이 미국에 갔다가 거기에 살고 계시는 수학 선생님을 만나면서 이일이 다시 회자되었다. 선생님은 결혼해서 사업하시면서 잘 살고 계셨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도토리 얘기가 나와서 무척 즐거웠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사진도 찍어왔다는데 다음에 한 번 봬야겠다. 

 



Posted by 네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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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학창시절 해프닝이었군요.
    여고에서는 참 말도 탈도 많다고 여동생이 그러더군요. ㅎㅎㅎ

    2011.07.26 09:3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여고는 약간 우주와도 같은 성격이 있어요.
      끝도 없고 색도 없고 예측불허하고 ㅎ

      2011.07.27 10:32 신고 [ ADDR : EDIT/ DEL ]
  2. 선생님과 추억이 있었군요. 돌아보면 다 추억이고 그 당시의 아픔이 있다 할지라도 이제는 돌아 보면서 웃을 수 있지요. 지금도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선생님은 좋아 하실겁니다. 그 선생님 잘 계시죠? 지금 사업하고 계신다고 하시니, 사업도 번창하시길 바래보네요.

    2011.07.26 09:4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어찌나 유쾌하신지 예전에는 선생님이어서 그나마 덜 하신거라고 하더래요 ㅎㅎㅎ 사업도 잘 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긴 그 성격이시니 무엇인들 못하실까 생각도 들구요 ㅎ

      2011.07.27 10:33 신고 [ ADDR : EDIT/ DEL ]
  3. 와우~
    좋으셨겠어요~
    저도 갑자기 고등학교때 생각이...ㅎㅎ

    2011.07.26 10:3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4. 이런 에피소드들이 정말 소중하고 즐거운 추억거리가 되는거 같아요.
    소중한 추억들을 만들어주신 선생님 한번 찾아뵈면 어떤기분일까요?ㅎ
    저도 예전 생각이 문득문득 나네요^^

    2011.07.26 10:5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아마 무척 반갑겠죠 ㅎ
      소중하고 아름답고 즐겁고...이래서 추억은 좋은 건가봐요.

      2011.07.27 10:34 신고 [ ADDR : EDIT/ DEL ]
  5. 큭 이런 에피소드가 ㅋㅋㅋ

    다 좋은 추억이겠어요 ㅎㅎ

    2011.07.26 11:0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6. 마음따뜻한 추억을 갖고 계시네요.
    추억이 있다는것 이야기꺼리가 있다는것 행복한 재산입니다.

    2011.07.26 11:03 [ ADDR : EDIT/ DEL : REPLY ]
  7. 아마도 영원히 함께 하는 추억거리 중 학창시절의 추억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것 같아요^^

    2011.07.26 11:0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러게요. 가장 강하고 진하게 남아있어요. 공부뿐 아니라 그 시절 자체가 중요한 게 이런 이유인가봐요 ㅎ

      2011.07.27 10:37 신고 [ ADDR : EDIT/ DEL ]
  8. 참, 애틋한(?) 추억을 가지고 있군요.
    옛 생각이 문득 나는군요.

    2011.07.26 11:1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9. 소중한 학창시절의 추억이네요

    2011.07.26 11:3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10. 아~~ 이글 보니 예전 기억이 마구마구 떠오르네요..^^
    잘보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2011.07.26 12:2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11. ㅎㅎㅎ 선생님의 숨겨둔 딸이 되어버리셨군요...
    이런 애피소드도 있네요... 흔하지 않은 추억입니다..^^

    2011.07.26 14:16 [ ADDR : EDIT/ DEL : REPLY ]
    • 당시에는 너무 어이가 없었는데 그 상대 아이들은 무지 심각하더라구요 ㅎ

      2011.07.27 10:38 신고 [ ADDR : EDIT/ DEL ]
  12. 마음이 따듯해지는 글이네요 ㅎ
    흥미롭게 잘 보구 갑니다^^

    2011.07.26 15:5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13. 좋은 추억이로군요
    화요일 오후를 편안하게 보내세요~

    2011.07.26 17:1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14. 학창시정 해프닝이네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잘보구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2011.07.26 17:4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15.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그 감정 그대로 느껴지는 것들이
    이런 학창시절의 추억인것 같아요.
    글을 읽으면서 저도 저만의 추억들을 생각해봅니다.. :)
    그때 그 친구들, 선생님들..
    다 안녕하시겠지요?^^

    2011.07.26 18:3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학창시절에 있었던 이런 일들은 언제 생각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거 같아요. 클라라 님은 지금부터 일생일대의 추억이 고스란히 쌓여가시겠죠? 그 길의 발자욱을 따라가며 그 추억도 슬쩍씩 나눠 담겠습니다 ^^

      2011.07.27 10:40 신고 [ ADDR : EDIT/ DEL ]
  16. 저도 너무 뵙고 싶은 선생님이 불현듯 떠오르네요.
    잘 지내시겠죠.
    잘 보고 갑니다.
    비가 많이 오네요. ㅠㅠ

    2011.07.26 23:1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저도 몇 분 계세요. 아마 그 분들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한동안 선생님 추억 블로그로 불려도 될 거예요. 에피소드도 무지 많거든요. 전 스스로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아주 웃기다는 듯이 이야기하더군요. 너 은근 사고 많이 쳤다...ㅋㅋㅋ

      2011.07.27 10:42 신고 [ ADDR : EDIT/ DEL ]
  17. 그런 기억들이 참 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인 것 같아요 ㅎㅎ
    학창시절의 추억..그런거겠지요^^

    2011.07.27 16:0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