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사는 이야기2011. 9. 22. 08:27

내지는 막내는 공짜로 자란다.
물론 안 그런 가정도 있겠지만 대체로 첫째에 비하면 둘째에 소홀해진다는 이야기들은 접할 수 있다. 아무튼 다른 집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집은 대충 그랬다.

가장 첫번째 차이. 이 집 막내는 백일사진, 돌사진이 없다!
첫째도 있고 둘째도 있는 이 사진들을 자신은 갖고 있지 않음을 알았을 때 진심으로 가출을 생각했었다.  막내가 태어나서야 카메라를 장만하신 아빠가 손수 백일 사진을 찍어주셨지만 거기에는 '백일기념'이라는 글자도 없었고, 사진 속의 애새끼도 너무 못생겼다. 돌사진도 마찬가지.

첫째 아들에 엄마는 올인하다시피했다. 둘째는 4살 되던 해 죽을 고비까지 넘겼다. 셋째 즉, 막내는 밥을 잘 안 먹는 거 빼고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일단 또래에 비해 너무 왜소하니 밥을 먹이려 애쓰긴 했지만 그 외 모든 것은 지가 알아서 하게 했다...아니 그냥 냅뒀다.
이 정도가 우리집 아이들에 대한 부모님 정확히는 엄마의 관심도였다.

다시 말하지만 백일 사진 속 캡 못생긴 애새끼가 나, 즉, 이집 막내이다.



의자가 책상 밖으로 나와있으면 애가 거기 있겠거니, 장롱에서 이불이 나와있었으면 거기 들어가 있겠거니 했다는 엄마는 나에게 무척 쿨했다. 그 증거물로 침대밑에서 자고 있는 사진도 있다.

그래도 완전 방치는  아니었다. 초딩 때 학원을 무려 4개나 보내셨다.  주산학원, 과외, 피아노, 미술학원이었다. 엄마와 나의 기억을 조합해보니 엄마가 보내겠다고 하신 건 아니고 언젠가  애가 하도 집에 안들어와서 찾으러 갔더니 동네 친구 따라서 미술학원에서 놀고있다고 해서 가서 끊어주고, 언니 피아노 학원에서 주는 가방 이쁘다고 그 가방들고 피아노 학원가서 앉아 있길래 피아노 학원 끊어주고, 할머니랑 앉아서 주판알 가지고 놀길래 주산학원 끊어주고, 동네에 아는 아줌마가 과외하니까 보내라고 꼬셔서 거기 보내고...

꼼꼼하게 따지고 알아보고 애의 재능을 생각한다거나 시류를 탄다거나 뭐 이런 종류의 학원 등록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와 학원을 가야하는데 갑자기 너무 괴로워졌다.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막내에게 엄마는 오늘은 무슨 학원이니?라고 한마디 물으신다. "나 학원들을 다 그만두어야겠어."라는 말에 엄마는 혼내지도 않으셨고 놀라지도 않으셨다. 다만 "왜?"라고 물으셨고 거기에 나는 "괴로워."라고 답했다. 엄마는 단칼에 오케이를 하시고는 각종 학원에 전화를 걸어서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괴로워."는 한동안 우리집의 유행어였다.

아무튼 친구 엄마이자 동네 아줌마였던 과외선생네 집에서 먹는 간식과 그 집 아이들과의 고무줄 놀이 관계를 생각해서 과외만을 남기고는 다 그날로 쫑했다. 이전에 언니나 오빠가 학원을 그만둘 때면 집안에 태풍급 잔소리가 이어졌던 경험이 있길래 엄마가 나한테만 쿨하게 학원을 그만두게 한 것이 무척이나 좋았었다.

그러나 엄마의 진실은 그랬다.  당시 언니는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그 학원 선생만 인정하는 --;)이 있어서 일반 학원 교습이 아닌 특별 교습을 받아야했고, 피아노도 샀어야 했고, 오빠 역시 본격적인 중딩생활이 시작되면서 특별과외가 필요한 시점이어서 교육비가 만만치않게 들었던 때였던 것이다.

울엄마 짱 쿨하다! 막내의 학원비 아껴서 큰 놈들 학원비 댔던 것이다.

지금도 이 이야기를 하면 가족끼리 웃는다. 넌 참 집에서 잘도 놀았다고. 누군가 내가 공부나 예능 생활에 매진한다거나 뭐 이런 걸 본 적은 없는 듯하다.

그래도 뭐 남은 건 있다. 애기때부터 카메라 앞에 서있어서 그런지 어릴 때 사진은 내가 젤 많다. 제일 많이 찍혔고 젤 이쁘게 찍혔다. 레알 못생긴 백일사진을 제외하고는.

게다가 학원을 안 다니니 시간이 널널했던 막내는 개집에서 개새끼들이랑 먹고자고놀고, 동화책은 하루에 한 권씩 꼬박꼬박 읽었고, 아빠 손 잡고 등산도 다니고 동네 아이들과 탐험단을 조직해서 놀러다녔다. 배포만 키운 막내는 조막만한 초딩4년 (참고로 그 나이까지 너무 작아서 부모님이랑 같이 버스를 타면 차비도 안 낼 만큼 덩치가 작았다) 주제에 직행버스에 완행버스 두 번 갈아타고 할머니네로 단독 여행을 감행했으며, 한 달을 머무르며 동네 아이들을 제 팬으로 만들어서 떠나는 날 터미널을 울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막내라 차별을 받았다할 수도 있다, 막내라 덜 귀하게 자랐다고도 할 수 있다, 막내라 자유롭게 자랐다고도 할 수 있다.
막내라 일단 지멋대로 일 벌이고 지멋대로 책임지는 것은 배웠다. 적어도 우리집에서는.

그래서 '짱 쿨한 울엄마도 좋아'인 것이다.


(명절에 모여 가족간에 이 얘기 저 얘기하다가 나온 옛날 이야기 중 한 대목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즐거워했었다 ^^)
Posted by 네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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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보고갑니다 좋은하루되세요~

    2011.09.22 08:3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ㅎㅎㅎㅎ 전 막내가 잴루 부러워요~

    전 첫째여서 그런지~ 그 심적 부담감은 말로 다~ 못한답니다 ㅎㅎㅎㅎ

    2011.09.22 08:55 [ ADDR : EDIT/ DEL : REPLY ]
  3. 막내로서 어린 시절의 아픔(?)이 지금의 네오나님을 만들었네요 ㅎㅎ 대한민국 엄마들의 깊으신 교육철학 덕이네요.

    2011.09.22 09:3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4. 네오나님은 분명 시집도 안간 처녀라면서 말하는거 들어보면 한 서른 훌쩍 넘긴분 같애요~
    분명 애늙은이였을거야.. ㅡㅡ;

    2011.09.22 09:4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5. 레알 귀여운데요??
    저 사진은???ㅎㅎㅎㅎㅎㅎ

    아웅~!!
    "괴로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행할만했습니다
    완전 빵~!터져서리...ㅋㅋㅋㅋㅋㅋ


    생각해보믄 저도 그랬나봐요
    저도 막내...
    오빠는 엄마가 시험전에 맨날 책상 옆에 끼고 앉아서 가르쳤고
    저는 방바닥에서 데굴데굴 하다가 그냥 자버리고...
    학원에도 한번 안다녔어요
    "내가 젤 잘났어~"
    요런 못된 심뽀가 있어서 어디가서 배운다는게 자존심이 상했다나 뭐라나...ㅋㅋㅋㅋㅋㅋ
    근데 엄마가 억지로 안보내더군요...푸헤헤^^;;


    저도 아이 둘 키우면서 보니
    큰아이에게 기대하는게 큰만큼 더 많이 엄하고
    작은놈은 그냥 냅둡니다...ㅋㅋㅋㅋ
    자기가 웃기던가 말던가
    뭘하고 놀아도 위험한것만 하지마~!하게 되는...ㅎㅎ

    2011.09.22 11:0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6. 저도 막내인지라,,어느정도 공감이 많이 갑니다~ㅎ
    막내는 좀 자유롭지요 잘못해도 대강대강 애교로 넘어가고..ㅎ

    2011.09.22 14:1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7. 쿨한 어머니 슬하에 명랑항 따님이셨군요. ㅎㅎ
    괴롭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2011.09.22 14:5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8. 막내의 입장에서 공감이 많이가네요 ㅎ
    잘 보구 갑니다..!!

    2011.09.22 16:1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9. 정말 쿨하시네요^^ 쿨~쿨~쿨~

    2011.09.22 17:4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10. 저도 막내예요. 아무튼 반갑네요.
    네오나님은 아기자기하고 좋은 추억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잘 보고 갑니다.

    2011.09.22 20:3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11. 시엘

    괴로워...진짜 유행어가 될 만 하네요. 어린애가 괴로워...라니. ㅋㅋㅋ
    제가 아는 분도 3남매를 키우시는데, 첫째는 무조건 최고로 올인했고, 막내는 방목이라더군요.
    그리고 어느 분은 첫째를 잘 교육시켜 놓으면 나머지 동생들이 보고 따라서 배울 거라고 생각하시기도 했어요.

    2011.09.26 02:18 [ ADDR : EDIT/ DEL : REPLY ]
  12. 막내의 학원비를 아껴서 큰애들을 대는 ㅎㅎㅎㅎ
    쿨하긴 쿨하시네요 =ㅁ=;;;

    2011.09.26 17:0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13. 샘솟듯

    ㅋㅋ 애 둘 키우고 있는 엄마로서, 정말 공감...
    둘째에게 쿨해질 수 밖에 없는 내 마음 나도 몰라예요~
    교육비도 완전 공감이고요, 다치지만 말고 이쁘게만 자라다오 이거예요.
    첫째는 뭐든 다 잘해야 하고, 둘째는 그냥 이쁘고. 이거. ^^
    그래도 둘 다 눈물나게 사랑한다는 거.

    2011.09.30 19:57 [ ADDR : EDIT/ DEL : REPLY ]